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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던 광주의 참상은 북부 독일 방송의 뉴스에 소개되면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하는 힌츠페터가 보강 취재하여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독일에서 유학하던 천주교 신부들이 녹화해 국내에 위험을 무릅쓰고 알리면서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이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진실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천주교는 518 당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궁금하여 서울주보를 찾아보게 되었다. 

 

 

1980년 5월 18일

 

주보가 발행된 5월 18일은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하여 무참하게 짓밟히기 전의 잠시나마 한국에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던 시기이다. 하지만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서울의 봄은 끝이 났다. 

 

1980년5월18일-서울주보-제호
서울주보(1980.5.18)

 

서울주보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명의의 시국 담화문을 발표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6개 교구장을 기본으로 바티칸 공의회가 승인한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의사결정기구이다. 

 

1980년5월18일-서울주보-한국천주교_주교회의의-시국담화문
서울주보(1950.5.18)

 

이날 시국담화문에서 천주교 주교회의는 “특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 획은 시급하다. 정부가 공약한 바 있는 민주헌정 확립과 정권 이양은 반드시(조속한 시일 내에) 실현되어야 한다”며 “만의 하나라도 이 공약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는 이 땅에 있어서 정치 불신은 물론 인간 불신으로 이어지고 국민적 단합은 기대할 도리가 없어지며 급기야는 여기서 초래될 정국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국가안보의 기틀마저도 흔들릴 염려가 크다”라고 우려했다.

 

또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치루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민주헌정의 기초를 이루어야 할 인간존중과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도 이들의 석방, 사면, 복권이 조속히 실현되기를 촉구한다”며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하여 되도록 속히 민주정치를 정착시키는 것만이 시국의 불안을 해소하는 첩경임을 거듭 제언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25일

 

신군부가 광주가 폭도들로 인해 소요사태가 일어났다고 23일 언론을 통해 처음 알린 때이다. 

 

1980년5월25일-서울주보-제호
서울주보(1980.5.25)

 

서울주보는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의 연행소식을 전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관련되어 54일간 구금된 사건이다. 

 

1980년5월25일-서울주보-김승훈신부-함세웅신부의-연행소식
서울주보(김승훈, 함세운신부 연행소식)

 

김승훈 신부는 1974년 천주교정의사제단을 창립하여 민주화 운동을 한 사제로 유명하다. 특히 1987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기념미사 중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 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된 사실을 밝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김승훈 신부는 2003년 9월 간암으로 선종하였다. 

 

함세웅 신부 역시 천주교정의사제단을 창립하고 고문을 역임하는 등 현재까지도 천주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인사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 6월 1일

 

6월 1일 주보는 5월 27일 시민군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도청이 신군부에 의해 무력 진압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이후 발행된 서울주보이다. 

 

1980년6월1일-서울주보-제호
서울주보(1980.6.1)

 

당시 천주교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도청이 진압되기 전인 23일 담화문을 통해 “위정자들은 냉철한 자기반성으로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우리 모두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라고 당부했다. 

 

1980년6월1일-서울주보-김수환추기경-담화문
서울주보(김수환 추기경)

 

경갑룡 주교는 광주지역 복구를 위한 구호금품 모집을 호소하고 있다. 

 

1980년6월1일-서울주보-경갑룡주교-광주지역복구-구호금품모집호소
서울주보(경갑룡 주교)

 

 

1980년 6월 8일

 

서울주보는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80년6월8일-서울주보
서울주보(1980.6.8)

 

명동성당에서 수집된 혈액을 가지고 광주에 급파했지만 이미 광주 시민 자체내의 헌혈운동이 대단하여 혈액보관용 냉장고가 꽉 찼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는 “물질적 도움보다는 광주의 진실을 전 국민이 올바로 인식하도록 전해달라”는 광주 현지의 분위기를 전달했다. 

 

또한 광주사제들의 입을 빌려 “정부 최고 책임자의 공직적 사과없이 광주시민들의 한 맺힌 가슴을 풀길이 없다”고 언급했다. 

 

1980년6월8일-서울주보-광주시민우롱-책임자사과언급
서울주보(1980.6.8)

 

한편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와 성모병원은 헌혈운동으로 이틀간 총 370명이 참여했다고 알렸다. 

 

1980년6월8일-서울주보-광주혈액지원-대성황
서울주보(광주소식)

 

아울러 서울시 교육감이 각 고교에서 인근 성당에 교외생활 지도교사를 파견하여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지도하고 특히 천주교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각별히 유념해 달라는 공문을 발생했다고 폭로했다. 

 

1980년6월8일-서울주보-카톨릭학생들에게_부당한압력_폭로
서울주보(1980년)

 

엄혹한 시기에도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한 천주교의 노력은 결국 광주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리고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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